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외곽에 성곽을 축조하고, 강동6주 및 각 지방의 성곽도 튼튼히 정비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했다.
또한 과거제를 활성화하여 인재를 발탁하고 우대함으로써, 중앙집권제와 왕권을 동시에 강화했다. 강감찬은 1011년 이부상서(현:내무부장관)에 올라, 나라의 국방을 위하여 위하여 개령현(지금의 경북 금능군 개령면)에 두고있던 밭 12결(結:토지의 단위로 1등전의 경우 2,753.1평)을 왕에게 사뢰어 군호(軍戶:자식이 군대에 간 집)에 주게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모두 탄복했다. 이어서 그는 서경유수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로 임명되었는데,현종이 임명장의 여백에 이렇게 써서 주었다고 전한다. "경술년중에 오랑캐의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이 침입한 전란이 있었다. 만약 그때 강공의 전략을 채용하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의 옷을 입을 뻔했다." 그해가 현종 9년(1018),문하평장사는 오늘의 부총리 격이고,서경유수는 요즘으로 치면 평양시장이다.
유수는 오늘의 시장 격이지만, 당시로서는 평양 이북의 국경 방어를 책임지는 총사령관을 겸한 무거운 자리였다. 그때가 그의 나이가 이미 70이었다.
그 다음해 12월,고려가 고려국왕의 내조(來朝)와 강동 6성을 반환요구를 게속 거부하자 거란군은 마침내 소배압(蕭排押)의 지휘 아래 황제의 친위군으로 구성된 10만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 왔다. 이에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은열공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박종검(朴從儉)과 유참(柳參)을 판관으로 임명하여
20만 8,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막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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